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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늘로 책을 제본하다
바늘로 책을 제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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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루마리는 한때 정치부터 학문에 이르기까지, 글로 된 모든 자료를 기록하고 보존하는 표준적인 매체였다. '둘둘 말다'라는 동사의 뜻을 가진 라틴어 '볼루멘(volumen)'에서 유래한 말이다. 두루마리의 길이는 끝부분에 붙어 있는 막대기에 파피루스 종이를 얼마나 길게 감을 수 있느냐에 따라, 사실상 제한될 수밖에 없었다. 파피루스 종이는 파피루스 나무의 속을 파낸 후, 껍질을 잘게 잘라서 모아놓고 두들기거나 또는 눌러 얇게 펴서 만드는데, 다시 끝과 끝을 붙여서 길고 좁게 이어지는 두루마리용 종이로 만든다. 파피루스 종이는 접으면 쉽게 균열이 생기기 때문에 접어서 포개놓는 것이 실용적이지 못해 둘둘 말아서 사용했다.
종이에 써놓은 긴 원고를 보려고 두루마리를 펼치고 또 감는 일은 상당히 번거로웠다. 이러한 두루마리의 불편함을 해소하고 동시에 글을 쓰는 종이를 긴 줄로 이어야만 하는 수고로움도 없앨 수 있는 방법은, 종이를 일정한 크기로 접어 포갠 후에 한쪽 끝을 따라 하나로 묶는 것이었다. 새끼 양, 염소, 송아지의 가죽으로 만든 양피지와 고급피지는 접어도 균열이 생기지 않았기 때문에, 굳이 두루마리 형태로 보관할 필요가 없었다. 종이와 인쇄기가 등장하면서 책은 폭발적으로 늘어났고, 종이를 접은 곳을 바늘과 실로 꿰매어 책을 만드는 것도 점점 더 효율적으로 할 수 있게 되었다.
바늘은 가장 오래된 인공물 중의 하나이며, 다양한 쓰임새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바늘은 베일 테두리에서 낙타 가죽까지 어떤 것이라도 뚫어 꿰맬 수 있는 수단으로서, 외눈만 있고 머리는 없는 핀이다. 또 단지 한 가닥의 실로 자신의 흔적을 남기는 물건이다. 그러나 바늘로 단단한 재료를 뚫어 꿰맬 때, 바늘이 손가락을 찌를 수 있다는 결점이 있었다. 이때는 바늘의 보조도구인 골무가 해결책이었다. 가느다란 스프링 강선으로 된 날렵하게 생긴 바늘은 신이 준 선물이었다. 다이아몬드 모양의 고리는 바늘의 비스듬한 구멍에 실을 꿰려 사팔눈을 해야만 하는 우리에게 신이 보내준 선물이었다. 그리고 바늘은 서로 연계되었다고 믿기 어려운 다른 많은 20세기의 인공물이 발전하는 데 많은 기여를 했다. 바늘과 실은 옷을 짓게 했을 뿐 아니라, 인쇄된 종이들을 모아 책을 만들게 해주었다.
전통적인 책등의 모양은 실의 영향이었다. 책을 만들기 위해 종이 뭉치를 꿰면 실이 그 안에 들어 있어서 다른 쪽 가장자리보다 실로 꿰맨 부분이 훨씬 더 두꺼워졌다. 그래서 책을 쌓아놓거나 선반에 보관할 때 불편하지 않고, 바람직하지 못한 쐐기 모양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꿰매기 전에 바느질할 책등 부분을 둥글게 부채처럼 펴서 실이 서로 겹쳐 쌓이지 않도록 했다. 책의 앞표지와 뒤표지로 사용하는 단단한 판자는 책등 부분의 두께보다 충분히 더 두껍게 만들었고, 앞표지와 뒤표지를 이어주는 천으로 된 연결고리는 둥근 모양으로 되어 있는 책 내용물의 모양을 따랐다. 이러한 책의 특징은 뒤러의 에라스무스 초상화에서 분명하게 볼 수 있다. 책을 제본하기 전에 종이를 가지런하게 잘 조정했기 때문에 책의 앞부분 가장자리가 책등의 곡선에 걸맞게 맞춰져 있는 것이다.
오늘날의 책들도 책등 부분이 곡선 모양을 계속 유지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사실 더 보강된 제본용 천이 둥그렇기 때문이다. 제대로 된 책은 전면 가장자리와 책등 부분으로 된 네모진 모양을 하고 있다. 전통적인 제본 방식은 시간도 많이 걸리고 비용도 비싸서 새로운 방식만큼 경제적이지 못해 형태에 변화가 생겼다. 이제 일반 책은 '무선철' 방식으로 제본하는데 낱장들을 접어서 포개는 것은 같지만 바느질은 하지 않고 접착제를 사용한다. 오히려 낱장들을 모아서 쌓아 상자처럼 가지런하게 잘 정돈한 다음에 접지한 부분을 잘라낸다. 접은 부분에 실이 들어 있지 않기 때문에 종이를 쌓아놓아 책등 부분이 부풀어 오르지 않아 굳이 둥글게 만들 필요가 없다. 대신에 접착제가 골고루 잘 묻을 수 있도록 등 부분을 거칠게 깎아내기만 하면 된다.
이 방식은 처음에 값싼 문고판에만 적용되었지만 지금은 거의 전반에 사용된다. 많은 저술가, 독자 및 애서가에게는 실망스러운 일이겠으나, 심지어는 가장 비싼 양장본을 제본할 때도 적용된다. 그러나 무선철엔느 큰 결함이 있었다. 그렇게 제본된 책은 단 한 번 읽었는데도 모양이 심하게 망가졌다. 그래서 오늘날의 서가에는 끝을 둥글게 하여 산뜻해진 책의 잔물결 대신에, 주름이 생겨 책등 부분이 들쑥날쑥한 책들이 꽂혀 있다. 한쪽 끝에서 바라보면 한 번 읽은 무선철 책들이 애처롭게 비스듬하게 꽂혀 있는 모습에서 책의 형태가 운명에 따라 어떻게 망가지는가를 생각하게 한다. 근시안적 시각의 제본사에게는 문제가 안 될지 몰라도, 형태에 대해 나름대로 애정을 갖고 있는 사람에게는 실망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출처 : 《포크는 왜 네 갈퀴를 달게 되었나》 - 헨리 페트로스키 지음 / 이인식 해제 / 백이호 옮김 - 김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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